오디세이, 놀란이 시계를 내려놓은 173분

영화5.0
오디세이, 놀란이 시계를 내려놓은 173분

이 글에는 「오디세이」의 마지막이 나옵니다. 다만 3천 년 전에 결말이 공개된 이야기라 스포일러라는 말을 꺼내기가 좀 민망합니다. 그래도 놀란이 어디를 자르고 어디를 늘렸는지는 직접 보시는 편이 낫습니다.

 

순서대로 가는 놀란 영화

놀란 영화는 보통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러 가죠. 시간이 거꾸로 흐르거나 꿈이 몇 겹씩 쌓이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니까요. 이번엔 173분 동안 이야기가 순서대로 앞으로만 갑니다.

 

장치를 빼고 나니 이야기 자체가 얼마나 단단한지가 오히려 잘 보였습니다. 3천 년을 버틴 이야기에 트릭까지 얹을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요. 놀란이 이렇게 배짱 있게 찍은 영화는 처음 본 것 같습니다.

 

트로이에서 이타카까지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났고,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 귀갓길이 2시간 53분입니다. 신이 길을 막고, 바다가 막고, 괴물과 사람이 차례로 막아섭니다. 그사이 고향에서는 왕의 빈자리를 노리는 구혼자들이 아내 페넬로페를 몰아붙이고, 아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랐습니다.

 

이야기는 「집에 돌아간다」 하나로 3천 년을 왔습니다. 집을 오래 떠나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오디세우스 편에서 보게 되죠.

 

페넬로페의 베틀

이 영화에서 제일 놀란 인물은 페넬로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에서 기다리는 아내는 보통 배경입니다. 화면 밖에 있다가 마지막에 나와서 울면 역할이 끝나죠. 앤 해서웨이의 페넬로페는 궁정이 구혼자들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 말을 아끼고 판단을 미룹니다. 그리고 그 미루기를 무기로 씁니다.

 

호메로스 원전에는 이 전술이 더 대놓고 나옵니다. 페넬로페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다 짜면 재혼하겠다고 약속하고, 낮에 짠 것을 밤마다 풀었습니다. 그렇게 3년을 벌었습니다.

 

답을 미루면서 3년을 버티는 동안 페넬로페는 한 번도 급한 티를 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영리하게 싸운 사람이 페넬로페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맥스로 찍은 바다

전편을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찍은 최초의 장편영화라고 합니다. 기록만 들으면 기술 자랑 같은데, 화면으로 보면 이유가 있더군요.

 

파도가 얼마나 높은지, 절벽이 얼마나 가파른지, 배가 얼마나 작은지를 화면 크기로 밀어붙입니다. 거리를 말로 설명하는 대신 몸으로 느끼게 합니다. 큰 화면 앞에 한참 앉아 있으니 20년이라는 시간이 조금은 실감이 났습니다.

 

바다 수평선도 자주 나옵니다. 가야 할 곳은 저 너머에 있는데, 지나온 길은 뒤돌아봐도 물뿐이죠. 저는 이 수평선 장면들이 제일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해변에 닿고도 집에 못 들어가는 오디세우스

제가 이 영화에서 제일 오래 붙들고 있던 건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와, 가족이 기억하는 오디세우스 사이의 거리였습니다.

 

십 년을 싸우고 십 년을 떠돌았습니다. 돌아온 사람은 떠날 때와 많이 달라져 있죠.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이타카 해변에 발을 딛고도 바로 집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거지로 변장하고, 시험을 거치고, 자기가 누군지 하나씩 증명해야 합니다.

 

집 앞까지 와서도 또 한참을 증명해야 하는 모습이 저한테는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오래 준비한 일을 겨우 끝내고 나면, 다 했다는 기분보다 「이게 처음에 하려던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 때가 있거든요. 오디세우스도 20년 만에 해변에 서서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쉬운 곳도 있습니다

루드비그 예란손의 음악은 고대 악기와 현대적인 저음을 섞어 신화를 지금으로 끌고 옵니다. 좋았습니다. 다만 놀란 특유의 쌓아 올리는 음악이 장면마다 끝까지 올라가서, 조용해야 할 자리에도 장엄함이 밀려듭니다. 몇 군데는 음악 없이 조용히 두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어요.

 

배우가 너무 많은 것도 걸렸습니다. 맷 데이먼, 톰 홀랜드, 앤 해서웨이, 로버트 패틴슨, 루피타 뇽오, 젠데이아, 샤를리즈 테론. 이름값이 이 정도인데 등장이 짧게 끝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에피소드마다 새 세계를 빨리 여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배우의 무게에 비해 서사가 얇은 자리가 분명히 보였습니다.

 

별점 5.0 / 5.0

맷 데이먼의 오디세우스 얼굴에는 이겼다는 기색보다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고집과 피로가 먼저 보입니다. 신화 속 인물을 사람 무게로 끌어내린 연기였습니다.

 

거대한 화면으로 두 시간 반을 밀어붙이다가, 마지막에는 한 사람의 얼굴과 한 가족의 기다림으로 좁혀 들어갑니다. 이 마무리가 저는 제일 좋았습니다.

 

이 영화는 되도록 극장 큰 화면으로 보시길 권합니다.

 

오디세이 ·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 출연 맷 데이먼, 앤 해서웨이, 톰 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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