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코 프레사지 SPB163은 제가 가장 아끼는 시계입니다. 2020년에 나온 이 시계는 남색 에나멜 문자판 하나만으로도 기억에 남는 모델입니다. 별점 5.0은 이 문자판에서 시작합니다.
에나멜 문자판은 빛을 받을 때마다 다른 남색을 보여 줍니다
SPB163은 세이코 프레사지 프레스티지 라인의 시계입니다. 일본 안에서는 SARW057이라는 이름으로 팔렸습니다. 문자판은 1971년부터 반세기 넘게 에나멜을 다뤄 온 장인 요코사와 미쓰루의 공방에서 손으로 만듭니다. 세이코는 그가 0.1mm 두께의 에나멜 막을 흠 없이 입히고, 습도와 날씨에 따라 유약 배합을 조금씩 바꾼다고 소개합니다.
에나멜은 유리질 유약을 바르고 높은 열에 구워 굳히는 재료입니다. 인쇄나 도장과 달리, 굽는 동안 색과 표면이 정해지고 그 뒤로는 손댈 수 없습니다. 시계 매체 모노크롬은 에나멜 표면에 작은 오목함과 점이 자주 남는데, 그것이 에나멜만의 개성이라고 적었습니다. 가운데가 살짝 낮은 접시 모양 문자판 위를 이중 돔 사파이어 크리스털이 덮어, 비스듬히 볼 때도 남색이 둥글게 살아납니다. 한 번 구워서 정해진 색을 매일 손목에서 다시 보는 일, 이 시계가 주는 즐거움은 거기에 있습니다.
나무 탁자 위에 놓인 SPB163, 남색 에나멜 문자판과 바늘식 날짜·파워리저브 눈금
리키 디자인은 덜어 낸 만큼 오래 보입니다
문자판의 얼굴은 와타나베 리키(1911~2013)에게서 왔습니다. 1949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디자인 사무소를 연 산업 디자이너입니다. 가구부터 벽시계, 손목시계까지 군더더기 없는 선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스틸 클락은 멀리서도 시간이 읽히는 벽시계였습니다.
SPB163은 그 벽시계의 문법을 손목으로 옮겼습니다. 시침은 끝이 삽처럼 넓고, 분침은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며, 초침은 곧게 뻗습니다. 다른 프레사지 모델의 로마 숫자 대신 길고 곧은 막대 인덱스를 세웠고, 러그도 케이스 옆선에 녹이지 않고 곧게 뽑았습니다. 장식을 덜어 내면 남는 것은 비율과 재료입니다. 이 시계에서는 그 재료가 에나멜이라, 덜어 낸 자리마다 남색이 채워집니다. 장식이 많은 문자판은 처음 볼 때 가장 빛나고, 덜어 낸 문자판은 오래 볼수록 덜 질립니다.
날짜와 남은 힘까지 바늘로 읽는 시계입니다
흔히 시계는 날짜를 작은 창에 숫자로 보여 줍니다. SPB163은 문자판 아래쪽 작은 눈금판에서 바늘이 날짜를 가리키고, 9시 쪽 바늘은 태엽에 남은 힘을 가리킵니다. 숫자 창이 없으니 에나멜 남색이 끊기지 않고, 문자판 위의 모든 정보가 바늘의 움직임 하나로 통일됩니다. 대신 날짜는 한눈에 읽히지 않고, 눈금을 따라가며 읽어야 합니다. 그 몇 초가 이 시계를 보는 방식을 바꿉니다. 시간을 확인하는 물건이던 시계가, 시간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하는 물건이 됩니다.
39.9mm 케이스와 코도반 스트랩은 손목 위에서 단정합니다
케이스는 지름 39.9mm, 두께 12.4mm의 스테인리스입니다. 방수는 100m이고, 크리스털은 반사 방지 코팅을 한 이중 돔 사파이어입니다. 스트랩은 폭 20mm의 갈색 코도반(말가죽)입니다. 40mm에 조금 못 미치는 지름이라 셔츠 소매 밑에서도 튀지 않고, 갈색 가죽이 남색 문자판의 차가운 기운을 눌러 줍니다.
무브먼트는 세이코가 직접 만드는 6R27 자동 칼리버입니다. 진동수는 4Hz, 파워리저브는 약 45시간, 하루 오차는 +25초에서 -15초입니다. 뒷면 유리로 무브먼트가 돌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미국 출시가는 1,300달러였습니다.
뒷면 유리로 보이는 6R27 자동 무브먼트와 갈색 코도반 스트랩
아쉬운 점은 두께와 45시간입니다
두께가 12.4mm라 셔츠 소매 안으로 넣을 때 걸릴 수 있습니다. 파워리저브가 약 45시간이라, 주말 이틀을 벗어 두면 월요일 아침에는 다시 시간을 맞춰야 할 수 있습니다. 바늘식 날짜는 보기에 아름답지만, 작은 눈금판이라 날짜를 빨리 읽기에는 숫자 창보다 불편합니다.
무브먼트는 문자판만큼 공들인 물건은 아닙니다. 모노크롬은 6R27의 마감을 기본적인 장식 수준이라고 적었고, 하루 +25초에서 -15초라는 오차 범위도 넉넉한 편입니다. 이 값이 어디에 쓰였는지가 분명한 시계입니다. 공은 문자판에 몰았고, 무브먼트는 제 할 일을 하는 선에서 멈췄습니다. 코도반 스트랩은 가죽이라 100m 방수 성능을 다 쓰기는 어렵습니다. 물놀이 때는 벗어 두는 편이 낫습니다.
오래 곁에 둘 시계 하나를 찾는 사람에게 맞습니다
매일 차는 정장 시계 하나를 찾는 사람, 숫자보다 재료와 비율을 먼저 보는 사람에게 맞습니다. 공예품 하나를 매일 손목에서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가격대에서 먼저 볼 만한 시계입니다. 초 단위 정확도가 중요하거나, 물가에서 막 차고 다닐 시계를 찾는다면 다른 시계가 낫습니다.
별점 5.0 / 5.0
한 번 구워 정한 남색을 매일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시계입니다.
Seiko Presage Prestige Line SPB163J1 · 세이코 프레사지 SPB163 · Seiko
출처
· 에나멜 장인·0.1mm 에나멜 막·유약 배합(세이코 프레사지 크래프츠맨십 소개, 10월 11일 확인) · https://www.seikowatches.com/no-en/products/presage/presage-craftsmanship-info
· 와타나베 리키·스틸 클락·바늘과 인덱스·요코사와 공방 손작업·에나멜 표면·6R27 진동수와 오차·미국 가격(모노크롬, 2020년) · https://monochrome-watches.com/2020-seiko-presage-riki-enamel-automatic-collection-spb113-spb115-spb161-spb163-price/
· 케이스·크리스털·방수·코도반 스트랩(모노크롬 실착 리뷰, 2020년 7월) · https://monochrome-watches.com/seiko-presage-riki-enamel-blue-spb163j1-hands-on-price/
· 프레스티지 라인(세이코 공식 와타나베 리키 특집, 10월 11일 확인) · https://www.seikowatches.com/global-en/products/presage/special/rikiwatanabe
· 요코사와 미쓰루 1971년부터 에나멜 작업(세이코 공식 장인 소개, 10월 11일 확인) · https://www.seikowatches.com/global-en/special/tokinowaza/yokosawa
· 일본 내수명 SARW057(Watch Outz 상품 페이지, 10월 11일 확인) · https://www.watchoutz.com/products/seiko-presage-prestige-line-automatic-enamel-dial-spb163-sarw057
· 표지 사진(모노크롬 실착 리뷰, 2020년 7월) · https://monochrome-watches.com/seiko-presage-riki-enamel-blue-spb163j1-hands-on-price/
· 사진(모노크롬 실착 리뷰, 2020년 7월, 문자판 윗면·뒷면 무브먼트) · https://monochrome-watches.com/seiko-presage-riki-enamel-blue-spb163j1-hands-on-p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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