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가능한 사랑」의 마지막 장면까지 나옵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됩니다. 11월 6일에 넷플릭스로도 공개되니, 극장을 놓치셨다면 그때 보시고 돌아오셔도 늦지 않습니다.
8년 만에 돌아온 이창동
「버닝」 이후 8년 만의 이창동 영화입니다. 러닝타임은 164분이고, 올해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은사자상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습니다. 한국 영화가 베네치아 경쟁 부문에서 상을 받은 건 2012년 「피에타」 이후 처음이고요.
감독은 이 이야기를 11년 전에 한 번 접었습니다. 해고 노동자 부부 시나리오를 써 두고 전도연, 설경구까지 정해 뒀는데 끝내 못 찍었다고 해요. 같은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이미 있는데, 내가 이걸 극영화로 만들 자격이 있나. 그 물음에 답을 못 찾았다는 겁니다.
다시 꺼내게 된 건 공동 각본가 오정미 작가 덕분이었죠. 해고 노동자 부부 옆에, 그 부부를 카메라로 찍는 또 한 쌍의 부부를 세워 보자고 제안했답니다. 다 보고 나니 그 제안이 영화의 뼈대가 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해고 노동자 부부와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
호석(설경구)은 대기업 공장의 용접공이었습니다. 구조조정으로 해고됐고, 파업과 강제 진압을 겪은 뒤로 술에 기대 삽니다. 아내 미옥(전도연)이 마스크 공장에 다니면서 호석과 열 살 아들 철을 먹여 살리고요.
예지(조여정)는 해고 노동자를 찍는 다큐멘터리 감독입니다. 압구정동 세탁소집 딸로 자랐는데, 대대로 돈이 많은 집 아들 상우(조인성)와 결혼했죠.
네 사람은 해고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옛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엇갈립니다. 호석은 술 때문에 소란을 피우고, 주차장에서는 미옥의 결혼반지가 차 밑으로 굴러 들어갑니다. 그 차 주인이 상우였고, 상우가 반지를 찾아 주죠. 첫 만남부터 누가 누구를 돕는 자리에 서는지가 정해집니다.
호석은 처음에 인터뷰를 거절합니다. 대신 미옥이 예지의 카메라 앞에 앉으면서 두 여자는 친구처럼 가까워지고요.
「메소드 연기」라는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상우는 노동자 부부에게 마음을 쓰는 아내를 보고 「메소드 연기」라고 비꼽니다. 예지는 「난 저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맞받아칩니다.
저는 두 사람 말이 다 맞아서 불편했습니다. 예지는 진심으로 다가가는데, 그 진심이 좋은 다큐멘터리의 재료가 되기도 하거든요. 예지 본인도 그 경계가 어디인지 모릅니다. 영화는 예지를 그 애매한 자리에 오래 세워 두고, 판단은 보는 사람 몫으로 남겨 둡니다.
이 대목에서 감독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어떤 영화를 만들든 영화 만드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라고요. 남의 고통을 내 일처럼 정직하게 대하는지, 아니면 영화 재료로 쓰고 있는지를 묻고 싶었고, 그 질문을 관객에게까지 넓히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자리에서는 자기도 예지처럼 자본과 결혼하고 사는 삶인지 모른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보는 내내 걸린 장면
저도 남의 이야기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강의 사례를 모으고, 영상 소재를 찾고, 고객 인터뷰에서 좋은 문장을 건지면 반갑죠. 그 반가움이 나쁠 건 없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반가운 순간에 한 번쯤 멈춰 보게 됐습니다.
예지는 호석이 입을 열기를 오래 기다립니다. 그리고 서해안에 있는 상우 집안 별장으로 네 식구를 초대합니다. 호석의 마음을 열어 보려는 뜻도, 좋은 장면을 얻고 싶은 마음도 겹쳤을 겁니다. 별장에서 호석은 마침내 카메라 앞에서 속을 털어놓다가 과호흡으로 무너지고, 예지는 그 순간 카메라를 내려놓습니다. 기다리던 장면이 나오는 바로 그때, 카메라 앞의 사람은 가장 약해져 있었던 거죠.
기획하는 쪽에서는 이런 순간이 제일 어렵습니다. 결과물로는 최고의 장면인데, 그걸 써도 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니까요. 영화는 카메라를 든 사람과 카메라 앞에 앉은 사람을 한 화면에 나란히 보여 주고 거기서 멈춥니다. 저는 그 장면이 한동안 머리에서 안 떠나더군요.
바다에 들어간 미옥
미옥은 별장을 「읽어 본 적 없는 소설 속 장소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상우와 바다로 갑니다. 미옥이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고, 상우가 따라 들어가 손을 뻗지만 미옥은 잡히지 않습니다.
감독은 이 장면을 두고, 상우처럼 절대적인 힘을 가진 사람 앞에서도 한 사람으로 마주 섰을 때 미옥이 지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영화 내내 도움을 받던 미옥이 여기서만큼은 스스로 고릅니다. 전도연이 이 장면을 몸 전체로 밀어붙입니다.
같은 별장에서 아들 철은 관리인에게 배워 정원에 물을 줍니다. 미옥은 그 모습을 한참 보다가 고개를 돌립니다. 이 집안의 일이 아들에게 그대로 내려갈지 모른다는 걱정이 얼굴에 남아 있었습니다.
대리석 평상과 보름달
호석네 마당에는 대리석 평상이 하나 있습니다. 회사 다니던 시절, 같이 일하던 동생들을 불러 술 한잔하려고 만든 자리입니다. 해고와 진압을 거치며 그 동생들은 흩어졌고, 평상은 한 번도 쓰이지 못했죠. 감독은 이 평상이 호석이 겪은 배신과 실패를 상징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영화는 그 평상에서 끝납니다. 별장에서 돌아온 호석과 미옥이 처음으로 그 자리에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고 보름달을 올려다봅니다.
감독은 달은 공평하다고 했습니다. 미옥에게도 예지에게도 같은 달이니, 그 달을 쳐다보는 장면이 누구나 꿈꿀 수 있는 가능한 사랑이라는 거죠. 제목도 같은 생각에서 나왔답니다. 사랑 이야기는 보통 이뤄지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가는데, 「가능한」을 붙여서 어떤 사랑이 가능한지,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묻고 싶었다고요.
결말은 꽤 담담합니다. 호석의 상처는 그대로고, 가족의 형편도 그대로예요. 그래도 한 번도 쓰이지 않던 평상에 두 사람이 앉았습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가능한」은 그 정도 크기입니다. 그래서 더 믿겼습니다.
배우들, 그리고 소리를 아낀 영화
전도연은 「밀양」 이후 19년 만에, 설경구는 「오아시스」 이후 20여 년 만에 이창동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해외 평단은 특히 전도연에게 박수를 보냈고, 버라이어티는 올해 가장 정교한 연기 가운데 하나라고 썼습니다. 설경구는 말보다 말을 삼키는 얼굴로 호석을 만들어 냅니다. 카메라 앞에서 무너지는 장면은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어요.
음악은 아주 드물게 나옵니다. 감독은 원래 음악을 많이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정재일 음악감독에게 최소한으로만 쓰되 영화의 구조와 감정은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감정이 차오르는 장면에서도 관객이 제 속도로 따라갈 틈이 있습니다.
아쉬운 곳
164분은 길었습니다. 앞쪽에서 두 부부가 가까워지는 과정을 꼼꼼히 쌓다 보니, 이야기가 제 궤도에 오르기까지 꽤 참아야 하거든요. 해외 리뷰 중에서도 데드라인이 거의 세 시간이라 조금 길다고 짚었습니다.
상우도 아쉬웠어요. 조인성은 잘 해냈지만 인물이 돈 많은 남편이라는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필름 코멘트도 상우가 끝까지 캐리커처에 가깝다고 지적했죠. 나머지 세 사람이 워낙 입체적이라 상우가 더 납작해 보입니다.
별점 4.0 / 5.0
보고 나서 제 일부터 돌아보게 됐습니다. 저도 예지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반가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같이 드는 때가 많거든요. 그 두 마음을 다 알고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안고 극장을 나왔습니다.
마지막 보름달은 꽤 오래 기억날 것 같습니다. 극장에서 보실 수 있을 때 극장에서 보시길 권합니다.
가능한 사랑 · 감독 이창동 · 출연 전도연, 설경구, 조인성, 조여정
출처
· 베네치아 영화제 공식 수상 발표 · https://www.labiennale.org/en/news/official-awards-83rd-venice-international-film-festival
· 한국 영화 베네치아 수상 기록(코리아헤럴드) · https://www.koreaherald.com/article/10871456
· 8년 만의 신작·배우 인터뷰(할리우드 리포터) · https://www.hollywoodreporter.com/movies/movie-features/possible-love-lee-chang-dong-netflix-1236682899/
· 감독 인터뷰(시나리오를 접은 이유·영화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음악) · https://deadline.com/2026/09/lee-chang-dong-possible-love-venice-netflix-1237067951/
· 11년 전 시나리오(엑스포츠뉴스) · https://m.news.nate.com/view/20260825n32557
· 오정미 작가의 제안(JTBC) · https://m.news.nate.com/view/20260916n36528
· 감독 인터뷰(바다 장면·보름달 결말, 씨네21) ·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10786
· 감독 GV(대리석 평상·달, 조이뉴스24) · https://www.joynews24.com/view/2009032
· 제목의 뜻(스포티비뉴스) · https://www.spotv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3831
· 자본과 결혼한 삶(파이낸셜뉴스) · https://www.fnnews.com/news/202609231126093863
· 인물 설정(국민일보)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9000016586&code=61171111&sid1=lif
· 버라이어티 리뷰 · https://variety.com/2026/film/reviews/possible-love-review-1236846877/
· 데드라인 리뷰 · https://deadline.com/2026/09/possible-love-review-lee-chang-dongs-south-korean-oscar-pick-1237063045/
· 필름 코멘트 베네치아 결산 · https://www.filmcomment.com/article/venice-2026-hot-and-cold-woman-unknown-possible-love-review/
· 넷플릭스 공개일(머니투데이방송) · https://news.mtn.co.kr/news-detail/2026091815493022665
이 글 공유하기
KEEP READING
이어 읽을 인사이트
같은 주제의 글을 우선해 함께 읽기 좋은 기록을 골랐습니다.

오디세이, 놀란이 시계를 내려놓은 173분
이 글에는 「오디세이」의 마지막이 나옵니다. 다만 3천 년 전에 결말이 공개된 이야기라 스포일러라는 말을 꺼내기가 좀 민망합니다. 그래도 놀란이 어디를 자르고 어…

옵세션, 소원은 하나도 안 틀렸다
이 글에는 「옵세션」의 결말이 나옵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됩니다. 마지막 장면은 모르고 보시는 편이 훨씬 좋거든요. 나뭇가지 장난감에 빈 소…

컨택트, 화이트보드에 쓴 첫 단어
이 글에는 「컨택트」의 결말까지 나옵니다. 화이트보드의 「HUMAN」 지구 위 열두 곳에 외계 비행체가 떠 있고, 미 육군 웨버 대령(포레스트 휘태커)은 언어학자…
COMMENTS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