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 화이트보드에 쓴 첫 단어

영화5.0
컨택트, 화이트보드에 쓴 첫 단어

이 글에는 「컨택트」의 결말까지 나옵니다.

 

화이트보드의 「HUMAN」

지구 위 열두 곳에 외계 비행체가 떠 있고, 미 육군 웨버 대령(포레스트 휘태커)은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애덤스)에게 「왜 왔는가」부터 물으라고 재촉합니다. 루이스는 그 질문을 화이트보드에 써 놓고, 이 한 줄이 통하려면 먼저 알려 줄 것이 셋이라고 설명합니다. 질문이 무엇인지, 「너 하나」와 「너희 모두」의 차이, 그리고 의도입니다. 비행체 안에서 루이스가 들어 보인 팻말에는 「HUMAN」 한 낱말이 적혀 있습니다.

 

「HUMAN」 팻말을 든 루이스「HUMAN」 팻말을 든 루이스

 

마작으로 연 대화

온 까닭을 묻기 전, 루이스는 중국 팀이 마작으로 헵타포드와 대화한다는 걸 알고 말합니다. 「내가 영어 대신 체스를 가르쳤다고 해 봐요. 모든 대화가 게임이 되고, 모든 생각이 이기고 지는 말로 나올 거예요.」 망치만 쥐여 주면, 하고 말끝을 흐리자 웨버 대령이 「모든 게 못으로 보이겠지」라고 받습니다. 마침내 온 까닭을 묻자 돌아온 답은 「무기를 주다」로 읽혔고, 중국은 이를 「무기를 쓰다」로 받아들여 교신을 끊습니다. 러시아 팀도 「시간이 없다」로 읽히는 메시지를 받고 위협일지 모른다고 봅니다. 루이스는 그 기호가 「수단」이나 「도구」에 더 가깝고, 중국의 오역은 승패를 다투는 마작으로 대화한 탓일 수 있다고 봅니다.

 

열두 곳에 나뉜 메시지

빛나는 화면 앞에서 문자를 읽는 연구팀빛나는 화면 앞에서 문자를 읽는 연구팀

 

나라끼리 연락이 끊긴 뒤, 물리학자 이안 도넬리(제러미 레너)는 헵타포드의 긴 메시지가 펼쳐지는 공간의 정확히 12분의 1만 채운다는 걸 알아냅니다. 메시지 곳곳에는 「시간」을 뜻하는 기호가 들어 있습니다. 루이스는 메시지 전체가 열두 비행체에 나뉘어 있다고 봅니다.

 

샹 장군의 아내가 남긴 말

막다른 순간, 루이스는 중국 샹 장군의 개인 번호로 전화를 걸어 장군 아내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을 전합니다. 앞날의 어느 행사에서 장군이 직접 알려 준 번호와 말입니다. 원판은 이 말을 영어 자막 없이 중국어로만 들려주는데, 각본가 에릭 하이서러가 밝힌 뜻은 「전쟁은 승자를 만들지 않는다. 과부를 만들 뿐이다」입니다. 중국은 물러서고, 다른 나라들도 자기 몫의 메시지를 내놓습니다.

 

유리 너머 문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면유리 너머 문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면

 

회상이 아니었던 장면

영화는 딸 해나를 병으로 잃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루이스는 「나는 이게 네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 뒤로 끼어드는 해나의 장면은 회상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올 일입니다. 루이스는 그 끝을 알면서도 그 삶을 고르고,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해나, 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돼」라고 말합니다.

 

첫 낱말이 나머지를 읽는 법을 정합니다

질문이 짧을수록 상대가 미리 알아야 할 것은 길어집니다. 기획을 맡긴 쪽이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라고 물을 때가 꼭 화이트보드 장면입니다. 그 짧은 질문 밑에는 「고객」이 지금 사는 사람인지 앞으로 살 사람인지, 「성공」이 매출인지 재구매인지 같은 약속이 먼저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 약속 없이 결론부터 받으면 답은 왔는데 읽을 수가 없습니다. 대령의 조급함은 이해가 갑니다. 다만 루이스가 「HUMAN」 같은 낱말에 들인 시간은, 나중에 「무기」를 「도구」로 다시 읽는 밑천이 됐을 겁니다.

 

마작 장면에서 눈여겨볼 곳은 마작을 고른 손입니다. 중국 팀이 왜 마작을 골랐는지 영화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은 처음 보는 상대 앞에서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것부터 꺼냅니다. 첫 낱말은 상대를 향해 고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 손에 가장 익은 도구를 꺼내는 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첫 낱말에는 상대보다 내가 더 많이 드러납니다. 기획 회의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경쟁사 비교표부터 펴는 데 익숙한 사람이 회의를 열면, 안건이 무엇이든 누구를 이길지의 문제로 흘러갑니다. 고객 인터뷰를 「설득」이라는 낱말로 준비하면 고객의 망설임은 넘어야 할 반론이 됩니다. 새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습관처럼 꺼내는 낱말을 한 줄 적어 보면, 그 회의가 어디로 흘러갈지도 대강 보입니다.

 

영화는 루이스가 겪은 오역을 객석에도 그대로 시킵니다. 첫 장면이 해나의 죽음을 지난 일처럼 보여 주자, 관객은 뒤에 오는 해나의 장면을 회상으로 읽게 됩니다. 루이스의 말대로 마작이라는 첫 도구가 「무기」의 뜻을 기울였다면, 같은 일이 객석에서 한 번 더 일어난 셈입니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에게 이건 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첫 장면, 첫 슬라이드, 첫 문단은 내용의 일부이기 전에 나머지 전체를 읽는 법이 됩니다. 이 영화는 그 힘을 알고 일부러 거꾸로 썼습니다. 우리는 대개 그 힘을 모른 채 첫 장면을 고릅니다.

 

판을 바꾸는 말은 판 바깥에서 옵니다

나라들은 답 한 줄로 판단해 문을 닫았는데, 전체 메시지는 모든 나라가 조각을 모아야 읽히는 것이었습니다. 받은 문장 하나에 바로 답하고 싶을 때는, 그 문장이 전체의 몇 분의 1인지부터 묻는 편이 안전합니다. 고객 피드백 메일의 첫 줄이나 회의에서 나온 반대 한마디도 대개 전체의 한 조각입니다. 헵타포드가 고른 방법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들은 메시지를 열두 조각으로 나눠 한 나라 혼자서는 못 읽게 만들었고, 협력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구조를 건넸습니다. 여러 팀이 한 프로젝트를 나눠 맡을 때 「서로 잘 협력하자」는 다짐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한 팀의 결과물만으로는 완성되지 않게 과제를 나누면, 협력은 다짐 없이도 일어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날카로운 연결은 샹 장군의 전화에 있습니다. 이기고 지는 놀이로 말을 익힌 쪽을 멈춰 세운 그 전화 속 문장이, 하필 전쟁에는 승자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같은 틀 안에서 더 정교한 논리를 댔다면, 장군은 그것도 승부의 말로 읽었을지 모릅니다. 회의가 이기고 지는 판으로 굳으면 자료를 하나 더 얹을수록 판만 길어집니다. 판을 바꾸는 말은 대개 그 판 바깥에서 옵니다. 「이 결정으로 누가 이기느냐」를 따지던 자리에서 「이 결정이 끝나면 무엇이 남느냐」를 묻는 한 문장 같은 것입니다.

 

끝을 미리 아는 사람의 선택도 남습니다. 결말이 정해져 있으면 시작할 이유도 없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루이스는 해나의 끝을 알면서도 「그 모든 순간을 반긴다」고 말합니다. 루이스가 그 삶을 고른 이유는 결말보다 그 사이의 날들에 있었습니다. 결과만으로 일을 고르면, 그 사이의 날들은 계산에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별점 5.0 / 5.0

망치를 쥔 손에는 선물도 무기로 읽힙니다.

 

컨택트 · 감독 드니 빌뇌브 · 각본 에릭 하이서러 · 원작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출연 에이미 애덤스, 제러미 레너, 포레스트 휘태커, 마이클 스털버그, 치 마

 

출처

· 영화 정보·줄거리·각본가 해설(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Arrival_(film)
· 대사 원문(위키인용집) · https://en.wikiquote.org/wiki/Arrival_(film)
· 원작 「당신 인생의 이야기」(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Story_of_Your_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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