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께 일 하나를 거절하는 메일을 써야 합니다. 빈 화면 앞에서 한참 망설이다 AI 초안 버튼을 누릅니다. 초안은 깔끔합니다. 두어 군데 손보고 보내기를 누르죠. 그런데 그 메일, 누구의 말투로 나갔을까요?
초안을 받은 사람은 초안의 말투로 씁니다
미국 워싱턴대·인디애나대 연구진이 바로 이 질문을 실험으로 따져 보고 9월 22일 논문을 공개했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전일제 직장인 175명을 모아, 상사에게 보낸다고 치고 메일 세 통을 온라인으로 쓰게 했습니다. 부탁, 반대 의견, 일 거절, 세 가지 상황 모두 연구진이 정해 줬습니다. 한 번은 혼자 쓰고, 한 번은 돌려 말하는 초안을, 한 번은 곧장 말하는 초안을 받아서 썼습니다. 고치든 버리든 참가자 마음이었고요.
사람들은 초안에 많이 기댔습니다. 일본·미국 참가자 모두, 어떤 초안을 받았든 최종 제출한 메일 단어의 평균 85% 이상이 초안에 있던 단어였죠. 더 눈에 띄는 건 따로 있습니다. 일본 참가자는 곧장 말하는 초안을 받자 말을 부드럽게 만드는 표현을 덜 썼습니다. 공손한 부탁이나 사과 같은 말이 혼자 쓸 때보다 100단어당 3.7개 줄었습니다. 돌려 말하는 초안을 받았을 때는 변화가 0.23개에 그쳤고요. 미국 참가자는 반대로, 돌려 말하는 초안을 받았을 때 말투가 더 크게 흔들렸습니다.
안 맞는 초안에 더 끌려갑니다
일본 참가자들은 평소 말투와 안 맞는 초안, 그러니까 곧장 말하는 초안을 받았을 때 조금 더 고치긴 했습니다. 그런데도 말투는 초안 쪽으로 훨씬 크게 움직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서부터는 논문이 아니라 제 해석입니다.
초안을 받는 순간 출발점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빈 화면에서는 내 평소 말투에서 시작하지만, 초안이 뜨면 그 초안에서부터 고치게 됩니다. 그리고 초안을 고칠 때는 아무래도 틀린 곳부터 찾게 됩니다. 날짜, 이름, 숫자 같은 것들요. 「번거로우시겠지만」 한마디가 빠진 건 틀린 곳으로 보이지 않으니 놓치기 쉽습니다.
한국 직장에서도 메일로 부탁하거나 거절할 때 돌려 말하는 경우가 많죠. 다만 이번 실험에 한국인은 없었으니 결과를 그대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윗사람에게 반대하거나 일을 거절하는 메일이라면, 말을 부드럽게 만드는 표현 몇 개만 빠져도 받는 사람은 그 차이를 꽤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초안을 받는 팀이라면
이 실험에서는 조건과 상황이 같으면 참가자 모두 똑같은 초안을 받았습니다. 팀 단위로 본 실험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말투가 초안 쪽으로 움직인다면 같은 도구를 쓰는 팀 전체 말투도 한쪽으로 모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팀을 이끄는 분이라면 요즘 팀원들이 보낸 메일 몇 통을 나란히 놓고 읽어 보면 어떨까요? 말투가 부쩍 비슷해졌다면 초안 버튼도 한 번 의심해 볼 만합니다.
1인 사업자에게는 더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고객에게 보내는 견적 메일, 일정을 미루는 사과 메일의 말투가 곧 내 일의 인상이니까요. 몇 년 동안 고객들이 좋아해 준 그 말투가 초안 버튼 몇 번에 조금씩 옅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한 통씩 보면 문제없어 보이니 알아차리기도 어렵죠.
초안보다 내 말투를 먼저 건네기
연구진은 AI 글쓰기 도구가 한 가지 말투를 기본값으로 두지 말고 쓰는 사람의 문화에 맞춰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도구가 그렇게 바뀌기 전까지는 우리가 먼저 챙길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전에 보낸 메일 두세 통을 AI에게 먼저 보여 주는 겁니다. 「아래는 내가 팀장님께 보낸 메일 두 통이야. 이 말투 그대로, 이번 일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메일을 써 줘.」 적어도 출발점을 내 쪽으로 옮겨 볼 수 있습니다.
거절이나 반대처럼 관계가 걸린 메일이라면, 보내기 전에 부탁과 사과 표현만 따로 한 번 훑어보세요. 내용 검토와 말투 검토를 나눠서 하는 거죠. 이 일도 AI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이 초안을 내가 전에 보낸 메일과 비교해서, 말투가 달라진 곳만 표시해 줘.」 고칠지 말지는 표시된 곳을 보고 내가 정하면 됩니다.
AI 초안이 있으면 빈 화면 앞에서 덜 막막합니다. 다만 초안에는 문장과 함께 말투도 딸려 옵니다. 받는 사람에게 오래 남는 건 어쩌면 문장보다 그 말투일지도 모릅니다.
출처
Shintaro Sakai, Alice Gao, Yuichi Shoda, Katharina Reinecke. AI-Generated Email Drafts Shift Culturally Distinctive Communication Styles in Professional Email. 2026년 9월 22일 arXiv 사전 공개 논문.
https://arxiv.org/abs/2609.26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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