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결말까지 나옵니다.
저녁 식탁의 세 부류
텍사스의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세상 사람을 셋으로 나눠 줍니다. 악이 있다는 걸 믿지 않다가 문 앞에 닥치면 자신을 지킬 줄 모르는 양, 약한 사람을 먹잇감으로 삼는 늑대, 그리고 늑대에 맞서 무리를 지키며 사는 양치기 개입니다. 크리스 카일(브래들리 쿠퍼)은 자라서 네이비 실 저격수가 되고, 이라크에 네 번 나갑니다.
「레전드」라는 별명
크리스의 첫 사살은 대전차 수류탄을 들고 미 해병대 순찰대에 다가온 여자와 아이였습니다. 크리스는 흔들리지만, 사살 수가 늘면서 동료들은 그를 「레전드」라고 부릅니다. 크리스는 시리아 출신 올림픽 메달리스트 저격수 무스타파와 맞섭니다. 대결은 2,100야드(약 1.9킬로미터) 밖에서 쏜 한 발로 끝납니다.
조준경 안에 들어온 아이
파병과 파병 사이
파병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크리스의 마음은 전장에 남아 있습니다. 아내 타야(시에나 밀러)는 남편이 집과 가족에게 마음을 두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파병에서 동료 비글스가 크게 다치고 마크 리가 숨지자, 크리스는 죄책감에 네 번째 파병을 떠납니다.
크리스마스트리 옆 텔레비전에 흐르는 전쟁 영상
구하지 못한 사람들
마지막 파병에서 돌아온 크리스에게 보훈병원 정신과 의사가 묻습니다. 전쟁에서 한 일들이 괴롭히지 않느냐고. 크리스는 자기가 쏜 한 발 한 발은 신 앞에서도 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를 괴롭히는 건 구하지 못한 동료들입니다. 의사는 구할 사람이 필요하면 이 병원 복도를 걸어 보라고 권하고, 크리스는 크게 다친 장병들을 돕기 시작합니다. 2013년 2월 2일, 크리스는 밝은 얼굴로 가족과 인사하고 PTSD를 앓는 참전 군인과 사격장으로 나섭니다. 화면에는 크리스 카일이 그날 자신이 돕고자 했던 참전 군인에게 살해됐다는 자막이 뜹니다.
남이 세는 숫자와 내가 세는 숫자는 다릅니다
2,100야드 사격은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숫자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을 괴롭힌 건 그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동료들은 사살 수로 그를 「레전드」라 불렀고, 크리스가 끝까지 붙들고 있던 건 구하지 못한 동료의 수였습니다. 한 사람의 같은 시간을 두고 장부가 두 권 따로 쌓였습니다.
콘텐츠와 기획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도 장부가 두 권입니다. 바깥 장부에는 조회수, 매출, 수주 건수가 적힙니다. 회의에서 불리는 것도, 남에게 소개될 때 따라붙는 것도 이 숫자입니다. 성과가 숫자로 남으면 그 숫자가 사람보다 먼저 소개됩니다. 안쪽 장부에는 놓친 제안, 마감에 밀려 덜 다듬은 채 내보낸 결과물, 챙기지 못한 동료가 적힙니다. 이 장부는 본인만 봅니다. 바깥 장부가 아무리 두꺼워도 안쪽 장부가 무거우면 쉬지 못합니다. 칭찬도 칭찬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카우보이스 스타디움 추모식 안내지
팀을 맡은 사람이라면 묻는 말을 하나 바꿔 볼 만합니다. 「이번에 몇 건 했어요」 다음에 「이번에 마음에 걸린 건 뭐예요」를 붙이는 것입니다. 바깥 장부는 시스템이 알아서 세어 주지만, 안쪽 장부는 본인이 꺼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릅니다. 영화 속 의사가 한 일도 그 장부를 꺼내게 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괴로운지 답이 나오자, 의사가 권한 일도 그 장부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구하지 못한 사람을 세던 사람에게, 아직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복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도 같은 쪽을 봅니다. 자막 한 줄 뒤로 실제 장례 행렬에 늘어선 사람들과 추모식 기록 영상이 이어지고, 크레딧은 음악 없이 올라갑니다. 「레전드」로 불리던 사람을 기록 대신 배웅하는 사람들의 얼굴로 보내는 셈입니다.
역할의 이름은 집까지 따라옵니다
크리스의 역할은 어린 시절 저녁 식탁에서 이미 이름을 얻었습니다. 양치기 개입니다. 그 이름은 전장에서 그를 버티게 했고, 집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집으로 부르는 동안에도, 동료가 쓰러질 때마다 그는 다시 무리를 지키러 나갔습니다.
일터에도 이런 이름이 있습니다. 「해결사」, 「에이스」, 「그 사람한테 맡기면 된다」. 별명은 칭찬으로 시작하지만 오래 불리면 짐이 됩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그 이름이 먼저 불리고, 불린 사람은 거절하는 법을 잊습니다. 휴가 중에도 메신저를 열고, 남의 프로젝트가 기울면 자기 일을 미뤄 두고 뛰어듭니다. 맡긴 쪽은 믿어서 맡겼고, 맡은 쪽은 그 이름에 걸맞으려고 받았습니다.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한 사람만 닳아 갑니다.
영화가 보여 주는 회복의 방식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크리스는 양치기 개라는 이름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지킬 무리를 옮겼습니다. 전장의 동료에서 병원 복도의 다친 장병으로, 그리고 집의 가족으로. 역할을 내려놓으라는 말은 그 역할로 살아온 사람에게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같은 역할이 향할 곳을 옮겨 주는 편이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에이스에게 「이제 그만 뛰어」라고 하기보다 「다음 사람을 키워 줘」라고 맡기는 일이 그런 쪽입니다.
크리스를 쏜 사람은 그가 돕고자 했던 참전 군인이었습니다. 역할을 옮긴다고 위험까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영화가 극 중 크리스의 마지막 모습으로 남긴 건, 밝은 얼굴로 가족과 인사하고 집을 나서는 아버지입니다.
별점 5.0 / 5.0
기록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그 사람보다 숫자를 먼저 부릅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 각본 제이슨 홀 · 원작 크리스 카일 회고록 「아메리칸 스나이퍼」 · 출연 브래들리 쿠퍼, 시에나 밀러
출처
· 영화 정보·줄거리(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American_Sniper
· 양·늑대·양치기 개 대사, 정신과 의사 장면 대사(제이슨 홀 각본 원문, IMSDb) · https://imsdb.com/scripts/American-Sniper.html
· 마지막 자막 문구(AOL 해설) · https://www.aol.com/american-sniper-ending-true-story-220000268.html
· 음악 없는 엔딩 크레딧(씨네덤프 2015년 리뷰) · https://cinedump.com/reviews/2015/1/26/american-sniper-2014
· 본문 사진(TMDB 스틸) · https://www.themoviedb.org/movie/190859/images/backdr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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