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결말까지 나옵니다. 2009년 영화라 이제 와서 스포일러를 따지기도 멋쩍지만, 아직 안 보셨다면 첫 장면만큼은 아무것도 모른 채 보시는 편이 좋습니다.
우유를 따르는 소리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소리는 우유를 따르는 소리입니다. 1941년 프랑스 시골의 한 낙농가에 나치 친위대 대령 한스 란다가 찾아옵니다. 별명이 「유대인 사냥꾼」인 사람인데, 집주인에게 처음 청하는 게 우유 한 잔입니다.
첫 장은 약 20분입니다. 그동안 총은 한 발도 안 나갑니다. 란다는 우유가 맛있다고 칭찬하고, 가족 이름을 하나씩 묻고, 서류철을 꺼내 받아 적습니다. 집주인이 파이프를 물자, 란다는 자기 주머니에서 훨씬 큰 파이프를 꺼내 뭅니다. 그러다 프랑스어 밑천이 다 떨어졌다며 갑자기 영어로 말을 바꿉니다. 마룻바닥 아래에 숨은 유대인 가족이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 뒤로 란다는 확인만 합니다. 「국가의 적을 숨기고 있죠?」 「네.」 「마루 밑에요?」 「네.」 란다는 처음부터 답을 알고 들어왔고, 20분 동안 그 답을 집주인 입으로 듣는 순서를 밟았을 뿐입니다. 총소리는 그 대답이 나온 다음에야 울립니다. 딸 쇼산나 하나만 들판으로 빠져나가고, 란다는 총을 겨눴다가 내리고 「오 르부아, 쇼산나!」 하고 외칩니다.
지하 술집의 손가락 세 개
지하 술집 장면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장면은 지하 술집입니다. 영국군 장교 히콕스는 독일군 장교로 꾸미고 접선 자리에 나갑니다. 전쟁 전에는 독일 영화를 연구하던 평론가였으니 독일어도 독일 문화도 자신 있었겠죠. 하필 옆자리에 앉은 친위대 소령이 억양이 이상하다고 파고들자, 산골 출신이라 그렇다고 둘러대 넘깁니다.
들킨 건 말이 아니었습니다. 위스키 세 잔을 시키면서 히콕스는 검지, 중지, 약지를 폈습니다. 독일 사람은 셋을 셀 때 엄지, 검지, 중지를 폅니다. 소령은 그 손을 봤고, 그 자리는 총격전으로 끝납니다.
일을 준비하면서 제가 점검하는 것도 대부분 말로 된 것들입니다. 대본, 자료, 받을 만한 질문 같은 것들이요. 이 장면을 보고 나니 손에 밴 습관도 목록에 올려야겠다 싶었습니다. 히콕스의 목록에는 손가락이 없었습니다.
네 개의 언어, 하나의 극장
이 영화에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가 나옵니다. 독일 장교는 독일어로, 프랑스 사람은 프랑스어로 말하니 상영 시간 대부분을 자막으로 보게 됩니다. 처음엔 번거로운데, 보다 보면 어느 언어를 할 줄 아느냐가 곧 살고 죽는 문제라는 게 보입니다. 그리고 란다는 이 네 언어를 다 합니다.
반대로 가장 웃긴 장면도 언어에서 나옵니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알도 중위는 이탈리아 영화인으로 꾸미고 나치 시사회장에 들어가는데, 이탈리아어라고는 「본조르노」 하나를 미국 남부 억양으로 겨우 합니다. 그 앞에 하필 란다가 서서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말을 걸죠. 극장에서 웃음이 터지는 장면인데 웃으면서도 손에 땀이 납니다.
쇼산나가 운영하는 파리의 극장
쇼산나의 극장 르 가마르
첫 장에서 살아남은 쇼산나는 몇 년 뒤 이름을 바꾸고 파리에서 작은 극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극장에 독일군 전쟁 영웅 졸러가 반해 드나들고, 자기가 주인공으로 나온 선전 영화 「국가의 자부심」 시사회를 쇼산나의 극장에서 열게 만듭니다. 괴벨스가 오고, 결국 히틀러까지 옵니다.
쇼산나는 극장을 통째로 태우기로 합니다. 불에 잘 타는 질산염 필름을 스크린 뒤에 쌓아 두고, 데이비드 보위의 「캣 피플」이 흐르는 동안 화장을 합니다. 그리고 시사회 중간에 자기 얼굴을 찍은 필름을 이어 붙여 둡니다. 객석의 나치들은 스크린 속 쇼산나에게서 「당신들은 유대인 손에 죽는다」는 말을 듣고, 그 스크린이 불타 무너집니다.
1944년, 파리 극장에서 죽는 히틀러
히틀러는 그 극장에서 죽습니다. 역사책과 다른 결말이죠. 타란티노는 10년 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도 실제 사건의 끝을 바꿔 씁니다.
이 대목에서 평가는 갈립니다. 평론가 대니얼 멘델슨은 유대인을 나치처럼 만들었다고 비판했고, 조너선 로젠바움은 홀로코스트 부정과 도덕적으로 닮은 데가 있다고까지 썼습니다. 저는 보는 내내 통쾌했지만, 끝나고 나서 그 통쾌함이 어디서 왔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됐습니다.
란다의 거래와 이마에 새긴 표식
란다는 사실 쇼산나의 계획과 별개로 바스터즈의 작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지하 술집에 떨어진 구두 한 짝으로 이중 스파이를 찾아냈거든요. 그런데 그는 작전을 막지 않고 거래를 겁니다. 작전을 그대로 두는 대가로 미국에 투항해 면책과 훈장을 받겠다는 거죠.
알도 중위는 그 거래를 지키긴 합니다. 다만 군복을 벗어도 평생 숨길 수 없게, 칼로 란다의 이마에 나치 문양을 새깁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남깁니다. 「이건 내 걸작이 될 것 같아.」
란다 역의 크리스토프 발츠
한스 란다
란다를 연기한 크리스토프 발츠는 이 역으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타란티노는 란다를 연기할 배우를 못 찾으면 영화로 만들지 않고 각본만 책으로 내겠다고 제작진에게 말했었는데, 발츠의 오디션을 보고 「내 영화를 돌려받았다」고 했습니다.
타란티노는 이 각본을 10년 넘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제목은 1978년 이탈리아 전쟁 영화 「The Inglorious Bastards」에서 따왔고, 철자는 일부러 틀리게 썼습니다. 영화는 제작비 7천만 달러로 전 세계에서 3억 2천만 달러를 벌었고, 아카데미 8개 부문 후보에 올랐습니다.
별점 4.9 / 5.0
이 영화는 2시간 33분 내내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그 말 가운데 억양 하나, 손가락 하나가 틀리는 순간 누군가 죽습니다.
타란티노는 마지막 대사로 이 영화를 스스로 걸작이라 불렀습니다. 저는 그 판정이 첫 20분, 우유 한 잔에서 이미 나왔다고 봅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 출연 브래드 피트, 크리스토프 발츠, 멜라니 로랑, 마이클 패스벤더
출처
· 영화 정보·평단 반응(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Inglourious_Basterds
· 란다 배역과 발츠 오디션(위키백과) · https://en.wikipedia.org/wiki/Hans_Landa
· 배우를 못 찾으면 각본만 내려 했던 사연(칸 기자회견, Den of Geek) · https://www.denofgeek.com/movies/inglourious-basterds-press-conference-report
· 첫 장면 분석(No Film School) · https://nofilmschool.com/inglourious-basterds-opening-scene
· 첫 장면 긴장 설계(Open Culture) · https://openculture.com/2021/12/a-deep-study-of-the-opening-scene-of-quentin-tarantinos-inglourious-basterd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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